1만 2천년 전에 지구를 연구하기 위해 안드로메다에서 온 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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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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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전승에 따르면 인류가 구 모양의 땅 - 행성이라고 부르는- 에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론 아무도 그 전설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구형의 땅덩어리가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으며, 거기에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인가?
고대인들의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로 여겨질 따름이다.

아무튼 행성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우주적인 재앙 -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이 일어나 인류의 절반 이상이 죽고 살아남은 인류는 신에 의해 새로운 땅으로 인도되었다고 한다.
그 새로운 땅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평평하고 먹을 것 걱정 없는 땅이다.
지금이야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땅 자체가 밥이라 영양분이 모자란다 싶으면 땅을 적당히 헤집어서 먹으면 되지만, 예전에 행성이라는 곳에 살 때에는 그렇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시대가 정말로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시대에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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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고 있는 철광석 제련 기술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데, 전설인지 실제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먼 옛날부터 철을 제련해왔으니까 말이다.

우리의 생활과 문화는 신에 의해 지배된다.



신은 엄청나게 크고 긴 젓가락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위에 얹힌 채로 땅을 일부 뜯어가기도 하고 우리가 만들어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집어가기도 한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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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자들은 큰 통에 넣어져 피를 짜내는 형벌을 당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었다 .

그러나 신은 우리가 사는 대지와 철광석이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공급해주시는 고마운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이 주신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 마을 전체가 대지와 함께 뜯기게 되었을 때도, 나는 신을 영접한다는 두려움과 설레임에 들떠 있었다.
우리는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엄청난 힘에 의해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정신을 차리자, 우리와 우리의 작은 대지 조각은 '바다'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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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며 색이며 질감이며,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인간의 피로 만들어진 끝모를 거대한 바다였다.
이것으로 우리가 지옥에 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렇다. 뺑소니를 치고 도망간 일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죄를 받아 지옥으로 온 것이다.
나는 오열하며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정신을 잃거나 미쳐 갔고, 탈진으로 쓰러지는 사람, 자살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고, 살아남은 것은 미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나 자신과 두어명 뿐이었다.

갑자기 밝은 빛이 비치며, 피바다까지 통째로 또다시 신에 의해 집어올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구원이다! 우리는 구원받았어!"
누군가 외쳤다.
나의 죄가 용서받은 모양이다.
나는 환희에 찬 기도를 올렸다.
갑자기 하늘이 뻥 뚫리더니, 세상이 하늘에 난 구멍을 향해 기울어졌다.
나는 피바다에 잠긴 채 핏물과 함께 뚫린 하늘구멍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머리에 둔탁한 충격과 함께 세상이 사라져버렸다.



다음 날 아침, 희망차게 인큐베이터를 열어젖혔지만 붉은 헴 철 배지에는 죽은 미생물들이 둥둥 떠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배지에서는 생존이 안 되는 모양이다.
"에잇! 진짜, 어떡해야 되는거야."
나는 짜증스럽게 배지 뚜껑을 열고 하수구에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초조해 하지 말고 다양한 조건으로 실험하며 경과를 보세. 반드시 산업화에 성공시켜야 하네. 우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반대 급부로 우리를 시샘하는 무리들도 많이 생겼어. 까딱 잘못하면 웨페트와 타쉬 박사처럼 사기꾼이네, 논문 조작이네 이런 소리 듣기에 딱 좋다는걸 명심하게. 자네를 믿겠네. "

블랙스미스 박사의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아아."
나는 가볍게 탄식을 내뿜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노트와 펜을 꺼내 어제 실험한 조건을 적고 '실패'라고 적었다.
그리고 온도와 압력 등을 조정해가며 헴 철 배지에 철 껍데기를 두르고 다니는 개체들만 골라서 넣어주면 어떨까 생각하며 실험 설계를 구체적으로 적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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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22:00 2008/04/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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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blacksmith는 새로운 기능성 미생물 발견 업적을 많이 쌓은 현장 생물학자 블랙스미스 박사가 채집한 미생물이다.

폴리머로 이룩해 온 우리 문명 세계에 있어서 신소재인 철 금속의 발견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 주는 장밋빛 약속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 환경에서는 철 원자 자체가 매우 희귀했다.

전 우주를 통틀어서도 철 원자는 귀하다.
항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이 몇번이고 반복되어 흔한 수소 원자가 철 원자가 되려면 희박한 확률의 행운과 긴 시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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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비되고 있는 금속철은 대부분 핵융합을 통해 생산된 것이지만 단가가 너무 비싸서 대량생산에는 부적합한 방식인 것으로 드러났다.


위대한 물리학자 웨페트 박사는 철 금속이 고체와 플라즈마 상태 외에도 액체라는 중간적인 상태를 가질 수도 있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고, 그의 제자인 타쉬 박사가 극히 정밀한 실험기기를 통해 철의 액체 상태를 실험실에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순수 금속철보다는 값싼 산화철 분말을 비슷한 조건으로 가열하면 때에 따라서 소량의 액체 금속철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밝혀져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는데, 웨페트와 타쉬 박사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빠른 '최고 과학자 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액체 상태가 나타나는 조건의 범위가 너무 좁아서 실험의 재현성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나 두 박사는 윤리적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로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순도 높은 금속철을 제련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내가 시도하고 있는 방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새롭고 놀라운 방법인 미생물 제련법이다.

블랙스미스 박사는 우연히 한 나선은하의 차가운 구석에서 금속철 집적도가 매우 높은 작은 행성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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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는 이 행성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금속철 부분을 팔아 돈을 벌 생각이었지만, 그 전에 어째서 이렇게 높은 집적도의 달성이 가능했는지가 궁금해져 행성의 표면에 현미경을 들이대 보았다.

놀랍게도 행성 표면에는 고순도 금속철을 껍데기(Shell)삼아 두르고 다니는 미생물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 미생물들이 알 수 없는 메커니즘으로 스스로 금속 철을 생산하여 철 껍데기를 만드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3부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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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19:29 2008/04/11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