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매체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의 보급으로 인하여 구비전승 문학의 맥이 끊어졌다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아니다. 여전히 구비전승 문학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으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곳은 문명의 이기를 개발, 생산하는 이공계다. 식사자리 술자리 간식자리 야식자리 등에서 주워들은 구비전승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건망증의 공격을 받기 전에 기록해두려고 한다.
펴기
이공계 사람이라면 내용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구비전승 이야기들은 비슷한 계통의 전공자들에게 쓴웃음을 유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공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통 아무 재미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 첫번째로 소개하는 것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려고 했던' 수학자 이야기다.
어느 수학자가 '20세기의 해결되지 못한 난제들' 중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어!"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수학자의 앞에 나타났다.
"정말 영혼을 팔겠는가?"
"이걸 증명해준다면 기꺼이 영혼을 팔겠네!"
수학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메피스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디 볼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거랑 이거랑,...... 또 이거. 이렇게 공부하면 일단 문제가 뭔지 감을 잡을 수 있을거야. 자네는 위대한 악마 아닌가. 그럼 기대하겠네."
수학자는 메피스토에게 책 한 더미와 논문 두어 뭉치를 주고 꽃무늬 남방에 반바지를 입고 연구실을 떠났다.
그리고 3년 뒤. 온갖 서류뭉치와 담뱃재가 수북한 재떨이 뒤에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것은 메피스토였다. 스키복 차림의 수학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악마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외딴 섬 마을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외부인의 방문을 받는 일이 거의 없이 고립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악마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빨간 눈의 저주를 내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펴기
"나는 방금 이 마을의 여섯 사람에게 빨간 눈의 저주를 내렸다. 이 저주를 받은 사람은 눈이 빨간색으로 변하는데, 자신의 눈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그 날 밤에 반드시 자살하게 된다. "
그리고 악마는 홀연히 사라졌다. 마을의 성직자는 다행히 성스러운 힘 때문에 그 자신만은 저주를 받지 않았다. 성직자는 마을 사람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한 대책으로, 백마법을 사용해 모든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눈이 멀게 만들어 서로의 눈 색깔을 확인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모든 거울과 얼굴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 비슷한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또, 사람들에게 눈 색깔에 대한 어떤 대화도 하지 말도록 신신당부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빨간 눈의 저주를 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 성직자의 말을 잘 따랐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성직자는 마을 사람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섬의 동떨어진 세 곳에 나누어 이주하도록 하고 서로 교류하지 않도록 했다. 마을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이 머는 마법을 오래 걸어놓을 수는 없었다. 세 무리로 나누면, 같은 무리 안에서만 서로의 눈 색깔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이 빨갛다는 것을 알아채기가 어려울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빨간 눈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마을에 빨간 눈인 사람이 다섯 명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므로, 자신이 빨간 눈이라는 것을 알아챌 우려가 있었다. 남쪽 무리에는 빨간 눈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서쪽 무리와 동쪽 무리에는 각각 빨간 눈을 가진 사람이 세 명씩 있었다.
성직자의 지혜 덕분에 세 무리로 나뉘어진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평화롭게 살았다. 악마는 자신의 장난이 잘 먹혀들지 않은 것을 보고, 여행자로 위장하여 세 마을에 각각 나타났다. 그리고 세 군데 모두에서 "이 무리에는 빨간 눈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군요." 라고 말했다.
다음 날, 빨간 눈이 하나도 없는 남쪽 무리의 사람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모두 각자의 눈에 빨간 눈인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빨간 눈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빨간 눈이 세 명인 서쪽 무리는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모두가 무사했지만 셋째날 밤에 빨간 눈인 세 사람이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빨간 눈이지만 자신이 정상적인 눈이라고 믿고 있는 한 사람은 자기 무리에 빨간 눈이 두 명 있다고 생각했다. 빨간 눈이 두 명이라면, 첫째날에는 자기 눈에도 빨간눈인 사람이 한 명씩보이기 때문에 둘 다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날에 다른 빨간눈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다른 빨간눈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의 눈에도 빨간눈이 한 명 보였기 때문일 것인데, 그것은 나 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날 밤에 두 빨간눈이 모두 자살할 것이다. 이런 추론을 통해 둘째날 밤에 두 빨간눈이 죽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셋째날이 되어도 둘 다 살아있다. 이것은 빨간눈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나 일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셋째날 밤, 세 명의 빨간 눈이 모두 자살했다.
그러나 악마가 아무리 기다려도 동쪽 마을에서는 누가 자살했다는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악마가 동쪽 마을에 가 보았다. 동쪽 마을의 세명의 빨간눈 중 한 명을 찾아가보니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태평하게 밭을 갈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그는 다른 두 빨간눈을 포함한 마을사람 몇명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했다. 다시 여행자로 가장한 악마는, 서쪽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그게 빨간 눈인 사람이 다음날 아직 안 죽어서.... 뭐가 어쨌다고요?" "그냥 난 밥이나 먹을래요. 난 도통 돌대가리라..."
악마는 그만 짜증을 내며 포기하고 지옥으로 돌아가버렸다. 추리력이 모자랐던 동쪽마을의 세 빨간눈은, 이후로도 평화롭게 잘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