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취향은 이중적입니다. 당신은 논리적이고 정교한, 치밀하고 계획적인 것들 좋아하면서도,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다양성을 지지합니다. 이성적인 격식(decorum)을 중시하면서도 자유와 열정을 선호하는, 이중적인 완벽주의자라고
하겠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20세기 인류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인 작가 중 한명. 가난, 냉대, 정치적 핍박, 치명적 뇌손상 등에 불구하고 인간 창의력의 극점에 달했던 인물. 당신의 취향에겐 '영웅'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당신의 취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그리스의 소피스트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날 '궤변론자'로
폄하되지만, 소피스트들은 국내외 다양한 생각과 사상을 받아들여 민주주의 제도를 구축했고, 표현의 자유와 가치의 다양성을 존중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수없이 많은 위대한 희곡과 미술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좋아하는 것 당신의 취향의 폭은 상당히 넓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도 많죠.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것을 묘사하자면, "과감한 독창성과 분출하는 창의력을 철저한 절제력과 단련된 수양으로 다듬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글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심재휘
저주하는 것 당신이 저주하는 사람들은 3부류로 나뉩니다.
첫번째, 가짜를 가짜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두번째, 가짜를 진짜라고 우기는 사람들. 세번째, 가짜인줄 알면서도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판치는 사회일수록 당신은 불만과 혐오로 가득할 겁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당신을 세상을 온통 증오하는
까다롭고 시건방진 염세주의자로 착각하기도 하겠죠.
그러나 문제는 가짜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연기가 안되는 사람이 배우랍시고 돈을 버는 세상, 노래가 안되는 사람들이 가수랍시고 대접을 받는 세상, 이런 세상에 불만과 혐오를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겠죠.
당신 중 일부는 극단적인 엘리트 취향이라 단순히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다른 취향을 가진 인간을 멸시-차등화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심한 경우 우생학에 기반한 파시즘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관점이죠.
태평양에 점점이 흩뿌려진 크고 작은 섬들. 예나 지금이나 열대지방의 바다와 누구도 다녀간 적 없는 풍요로운 섬 이야기는 대놓고 로망을 자극한다.
나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읽고 또읽고 다른 역자의 책을 부러 찾아서 또 읽고, 이면지로 만든 연습장에 나만의 무인도 표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소설이라기보단 환상을 글로 옮기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환상을 그려보는 활동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무인도 이야기는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날로 먹는' 무인도였다. 쾌적한 기후, 철철 넘치는 민물, 그대로 먹어도 끝내주게 맛있는 과일이 제철도 없이 지천으로 열리고 쉽게 잡히는 새가 활보하고 위험한 동물이란 하나도 없고, 마침 딱 살기 좋은 동굴이 있어 푹신한 이끼를 깔고 산다.
그런데 이 기사에 따르면 태평양의 거의 모든 외딴 섬에까지도,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라면 어김없이 사람이 살고 있거나 있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출발한 뱃사람들이 수백년에 걸쳐 이스터섬은 물론 남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는 학설도 있다.
이스터 섬의 모아이. '라파 누이'라고도 불린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신비로운 섬이다. 문자가 기록된 목판이 남아있지만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 이 문자를 '롱고롱고'라 부른다.
이 기사에서는 고대인들이 많게는 몇백 km까지도 망망대해로 분리된 작은 섬들을 탐험하는 것이 현대의 달 탐사에 비견될만한 대모험이라고 말한다. 이 모험을 한 뱃사람들을 우리는 라피타인이라고 부른다. 기원전 1200년경, 솔로몬제도에서 가장 가까운 산타크루즈 섬까지는 직선거리 370km의 망망대해로 중간에 기착할만한 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카누밖에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라피타인들은 산타크루즈섬과 그 너머 바누아투로 진출했다. 말이 370km지, 바람과 해류에 따라 경로가 흔들리다보면 그 두배의 거리는 가야 했을 것이고, 이것마저 목적지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정확히 알 때의 이야기다. 망망대해의 한 점에 불과한 미지의 섬이 어디있는줄 알고 계속 항해를 하겠는가? 운이 없으면 몇천 킬로미터를 항해해도 육지에 닿지 못할 수도 있다. 100년 후에는 800km 떨어진 피지까지 나아갔고, 태평양을 완전히 횡단해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은 기원후 1000년경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 호주까지도 진출했고 어쩌면 북아메리카로도 갔는지 모른다. 이렇게 넓은 범위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비교언어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언어를 구사하고 항해술이나 종교의식 등도 단일문화권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인류는 달에 발자국을 찍으러 다녀왔다. 언젠가 달에 인간이 살게 될 지도 모르지만, 아폴로 계획은 달에 발자국을 찍는 것이 목적이었지 달에 살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주거를 목적으로 달에 가려고 한다면, 아폴로 계획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라피타인들은 가족과 곡식, 생활도구, 가축까지 데리고 떠나서 영구정착했다.
더욱 이상하고 무서운 대목은 지금까지 이런 원양 항해를 할 수 있는 기술의 흔적이나 배 등의 항해 도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태평양 주민들의 배와 항해술은 근해 어업에는 적절하지만 먼 바다에 나갈만한 것은 못 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초고대문명설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살아남은 라피타인들은 내가 연습장에 끄적거렸던 것 같은 환상의 낙원 섬에 도달하기도 했다.
호주국립대 고고학자인 스튜어트 베드포드의 말을 빌면 이랬다고 한다.
"당시 이곳의 모습은 정말 굉장했을 겁니다. ..... 산호초들은 이런 고둥(지름 30cm 정도의 밤바퀴고둥)들로 뒤덮여 있었고, 이런 것 하나면 한 끼 식사로 충분했죠.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넘쳐났고, 우림에는 날지 못하는 새들이 있었죠. 게다가 녀석들은 인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잡을 수 있었어요. 라피타인들은 운이 너무 좋아서 낙원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과연 라피타인들은 누구였고, 왜 항해를 하게 됐으며, 어떻게 그런 항해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버렸을까?
이 post의 모든 사진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nationalgeographic.co.kr/
거의 매달 서점에서 내셔널 지오그픽 한글판을 사서 보고 있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좀 늦긴 해도 공짜로 볼 수 있지만, 사진들이 너무 매력적이라 '갖고싶다'는 마음이 발동되었다. 매달 1만7천원이면 한 달 생활비 30만원인 원생으로는 적은 돈은 아닌데....
다달이 책장에 빼곡해져가는 과월호를 보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두고 싶어졌다. 저작권 문제가 살짝 걱정이었는데 이런저런 저작권 관련 문헌들을 검토해 보니, 리뷰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생산한 컨텐츠가 아니라 리뷰어의 지적 생산물이기 때문에 기사 내용을 복사해 넣는다든지 사진을 스캔해서 올린다든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어도 리뷰는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도 내셔널지오그래픽 홈페이지에서 공개하고 있는 사진은 출처를 밝히고 쓴다면 괜찮을 것 같다.
아래는 NG 홈페이지에서 구한 3월호 소개. * 동물의머릿속 탐구 언어판을 써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보노보 칸지, 제인 구달이 발견한 침팬지들의 도구 사용 등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번 호에는 새로운 내용들이 더 많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아시아 코끼리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볼 수 있고 물고기인 아프리카 시클리드는 다른 개체들의 싸움을 보고 자기 서열을 가늠한다. '금붕어 대가리'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래도 물고기의 기억력이 몇 초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최소한 모든 물고기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고기도 '줄서기'를 할 줄 안다는 이야기로 들려 한참을 웃었다.
싸움구경, 줄서기를 한다는 '물고기 대가리' 아프리카 시클리드
아프리카 회색앵무의 머릿속은 더욱 신기하다.
알렉스 앵무새나 구관조가 인간의 말을 따라하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흉내내는 것 뿐이고, 그것도 잘 흉내내면 먹이를 주는 등의 상벌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개된 알렉스라는 앵무는 놀랍게도 스스로 연습한다. 계속 연습한다고 상을 주지도 않고 연습 안한다고 벌을 주지도 않았는데, 발음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이건 아마도 돌고래들이 아무런 상벌이 없어도 물 위로 뛰어 오르는 것을 많은 학자들의 회의론에도 불구하고 '놀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앵무도 '그냥 재미있어서' 해 보는 것 같다. '0'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매우 최근에 나타난 혁신적인 개념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앵무는 '0'도 이해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웃기고 신기한 언행(?)이 있었으니 바로 잘난척이다. 다른 어린 앵무가 발음을 잘못하자 "똑똑히 말해!"라고 반복해서 외쳤단다. 아이고 세상에. 그 외에도 서로 다른 물건들의 공통점이 색깔인지, 모양인지 등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추상화 능력을 의미한다.
앵무새 알렉스 말고도 까마귀, 오랑우탄, 양, 여우원숭이, 개, 문어, 침팬지, 마모셋, 어치, 돌고래, 코끼리, 물고기의 지능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사람 만나는 자리에서 잡담할 때 솔깃한 이야깃거리로 활용할 수 있을듯하다.
일본애니메이션 '쵸비츠'를 연상시키는 귀털(?)의 소유자 마모셋.
'구라' 칠 줄 알고 남을 등쳐먹기도 하는 어치.
'다채로운 정신세계'를 가지고 '역지사지' 개념이 있는 오랑우탄. '현명한 할머니'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
공기를 정화해주고, 이렇게 좋고, 저렇게 좋고... 실내 식물을 키우면 좋다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나도 반지하나 다름없는 어두운 곳에서 식물을 키운다고 오버(?)를 하고 있지만, 요즘 실내 식물에 대한 광고글들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장광고라는 인상이 많이 든다. 가습효과가 있어서 가족 건강에 좋다는 게 대표적인 예다.
* 가습 효과
가습기가 세균의 온상이라는 고발 프로그램이 방송된 이후 가습기를 대체할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는 것이 실내식물이다.
(사진은 내용과 별 관련이 없습니다. )
식물은 뿌리로 흡수한 물을 잎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기공을 통해 방출하는 증산작용을 한다. 물론 가습 효과가 있다. 하지만 미미하다.
식물로 가득한 온실을 꾸미고 그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면, 아파트 집안이나 사무실 같은 곳에서는 양손 안에 쏙 들어오는 조그만 화분에 한뼘 남짓한 산세베리아 하나 심어져 있는 화분을 서너개 가져다 놓는 게 고작이다.
가로세로 3m 정도의 사무실에 세 개의 작은 화분이 있다. 이걸로 건강에 도움이 될만큼 습도가 높아지길 바란다면 과한 기대가 아닐까?
실내 식물 키우기가 취미라서 집안 곳곳에 눈길 닿는 곳마다 식물이 배치되어 있을 정도라면 가습효과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식물취미가 없거나 시간이 없거나, 집안에 어린이나 치매환자, 애완견 등이 있는 경우에는 수십개의 각각 다른 화분을 잘 관리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실내 식물로 흔히 추천되는 관엽식물은 증산작용이 활발한 편도 아니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어서 관리하기 편하다고 선전하기도 하는데,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증산작용이 활발하지 않다는 뜻이다. 제한된 환경에서 관리가 편리하게끔 개량되는 과정에서 증산작용이 약한 개체들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광택나는 고무나무 잎. 광택은 왁스층에 의한 것으로, 잎에서의 물 증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관엽식물이 이러니 선인장 등 다육식물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선물이나 직접 구매를 통해 한두개씩 사무실이나 아파트로 입양된 무수한 식물들이 비좁은 화분, 건조한 토양, 부족한 햇볕에서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증산작용을 활발히 할래야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겨울철에는 건조한 실내공기 때문에 식물이 해를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습기를 가동하기도 한다.
식물이 좋아서 지속적으로 애정을 쏟을 결심으로 입양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가습효과가 필요한거라면 방 안에 빨래 널고 때때로 분무기로 물 뿌려주는 게 훨씬 효과있다.
가습기에 세균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대신 식물을 키운다고 해도, 식물과 화분에는 세균이 없나? 가습기와 화분에 있는 세균은 종류도 다르고 그 양도 다를 것이고 유해성에서도 차이가 날 것이고 따져보니 가습기가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식물과 흙, 수경재배할 경우 식물이 들어있는 물에도 엄연히 세균이 잔뜩 있는데 괜한 세균공포나 결벽증을 자극하여 식물을 사라고 하면 넌센스다. 그렇게 세균이 공포스러우면 가습기도 식물도 다 내다버려야 한다.
가습효과를 바라고 식물을 입양했다가 점차 식물 키우기의 매력을 느껴 식물 애호인이 되는 경우라면 바랄 나위가 없다. 그러나 헛된 믿음으로 돈 날리고 식물 죽이고 하지는 말자.
셋이서 쓰는 작은 공부방은 1층에 있다. 1층이라곤 해도 바로 앞에 지면보다 높게 돋워진 길이 있고 단 하나뿐인 창문 바로 앞에는 큰 나무들이 서있는데다 언제나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다. 한낮에도 형광등을 끄면 꽤 어두침침하다.
내 책상은 창문을 등지고 미색으로 칠해진 벽 뿐인 귀퉁이를 향해 있다. 그런 고로 우리 공부방의 햇빛 환경은 반지하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나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책장도 거의 텅텅 비어 있다. 공부하기에는 꽤 쾌적한 환경이지만 역시 미색 벽만 마주하고 있으니 뻘쭘한 기분이다.
..... 라고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실은 그냥 뭔가 생물을 키워보고싶다는 욕구가 발동해서 식물을 들여놓았다는 쪽이 훨씬 정직한 것 같다.
2월 말에는 꽃대가 올라오는 물재배 히야신스를 한 뿌리 가져다 놓았다. 꽃대가 며칠만에 쑥쑥 올라오고 진분홍색 꽃이 피어나고 향기가 나는 것은 좋았지만, 꽃이 지고 나자 햇볕이 너무 부족해서 웃자라기 시작했다. 결국 기숙사 방 창가로 보내야했다.
우리 공부방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을 열심히 알아보았다.
우리 방의 환경은, 햇볕이 절대부족하고 덥고 건조하며 바람이 없다. 이런 데서 잘 살 수 있는 식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내에서 키우게끔 개발되고 판매되는 많은 관엽식물들은 대부분 출신지가 열대, 아열대 지방이다. 열대에서 큰 나무들이 즐비한 숲 바닥의 음지에서 자라던 식물들이 개량된 것이 많다. 빛이 적고 덥다는 점에서는 잘 맞는데 습도가 안 맞다. 또 실내에서 많이 키우는 선인장이나 다육식물은 덥고 건조한 데서는 잘 자라지만 볕을 많이 봐야 한다.
결국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다가, 습도는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면 점차 높아질테고 그 전에는 분무기를 이용해서 버텨보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고무나무, 행운목, 포테리스를 각각 화분 포함으로 5천원씩에 구매했다. 포테리스는 고사리의 일종이라고 한다. 배송중 습도 보존을 위해 흙 위에 덮어 둔 것 같은 가짜 이끼는 모두 쓰레기통으로 고고싱 시키고 따로 식물원에 가서 완효성 고체비료 한 통을 3천원에 사와서 두세알씩 얹어 주었다.
(사진 찍는 실력은 형편없다. 구도가 뭔지도 모른다. )
먼저 고무나무
행운목
포테리스 이쑤시게는 흙 안쪽의 수분 상황을 알아보려고 꽂아 둔 것인데.... 이래 놔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빛이 너무 부족하면 아무리 음지식물이래도 잘 못 자랄까봐 보조 조명을 달아주었다. 사진 찍으려고 불을 잠시 껐다. 저 자바라 스탠드도 20W 형광등 포함으로 시장 철물점에서 1만원에 샀다. 식물재배용으로 출시되는 형광등이 따로 있지만, 가격도 비싸고 봉 형태로 된 것 뿐이어서 설치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 그냥 보통의 형광등으로 했다. 식물재배용 등은 이것보다 훨씬 밝기도 하고 색깔도 연보라색이 난다. '식물의 광합성을 돕는 짧은 파장의 빛이 많이 나와서 생장을 촉진'한다고 광고하는데, 이 부분은 좀 이상하다. 가장 주요한 광합성 색소는 엽록소, 엽록소는 초록색이고 680, 700nm 정도의 적색광을 흡수한다고 배웠다. 예전에 있었던 식물랩에서도 지하 온실에 켜 두었던 형광등이 연보라색이 아니라 백색이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백색광이면 여러 파장의 빛이 다 나올테니 안 켠 것 보다는 나을거라는 생각으로 그냥 샀다.
예전에는 물주기를 뿌리 부근의 흙에 종이컵이나 생수병 등을 이용해 부어서 화분 아래 구멍으로 물이 새어 나올 때까지 주는 방법을 썼다. 그런데 흙이 입자가 고우면 그런 방식으로 물을 주면 비 온 뒤 진흙땅이 벽돌처럼 딱딱하게 굳듯이 흙이 굳어지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흙이 굳으면 물을 줄 때 흙 표면으로만 물이 흘러서 바닥 구멍으로는 물이 나오지만 흙 안에 든 뿌리에는 물이 잘 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 쉽다. 위에서 물주는 방법으로 오래 키운 화분에서는 물을 줄때 삐이이~하는 소리가 나는 경우가 있었고, 분갈이 할 때 뒤집어보니 정말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번에는 저면관수를 하기로 했다. 저면관수는 화분 채로 물에 반쯤 잠기게 하여 잠시 방치하는 방법이다. 겨울에는 뿌리가 얼어 썩을 수도 있으므로 이 방법이 추천되지 않지만, 실내는 새벽까지 덥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저면 관수용으로 산 플라스틱 세숫대야 포테리스를 저면관수하는 모습 행운목을 저면관수 하는 모습 처음 배송받을 때 화분 바닥에 흙이 지저분하게 묻어있었는데, 대야 바닥에 보이는 검은 찌꺼기들은 거기서 나온 것이다. 화분 안에 든 흙이 저렇게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저면관수 시간은 15분 정도를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더 길게도, 짧게도 했고 주기도 내맘대로다. 물주기에는 정형화된 방법이란 게 없으므로. 굳이 있다면 고무나무보다는 포테리스와 행운목을 더 습하게 관리한다.
저면관수라는 단어가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담그기'라고 부르고 있다. 해보니 화분 받침에 올려놓았을 때 물이 흘러나와서 얼룩을 남기는 일도 없고 깔끔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고 포테리스와 행운목은 때때로 분무를 해준다. 분무 하고 나서 불과 십여분이면 언제 분무했냐는듯 말라버려서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이다.
분무기와 고체비료 물을 위에서 주지 않으니 고체 비료가 매우 느리게 녹을 것 같아서 물에 희석해서 쓰는 액체 비료를 2천원 주고 한 통 준비했다. 아직 가져오지 않았는데 다음에 담글 때 물에 섞어서 줘 봐야겠다.